무뚝뚝하고 말이 없다고 했다. 주위 사람들 평이 그랬다. 하지만, 국악 이야기에 제자들 얘기에는 달변가가 됐다. 하고 싶은 말도 많고 해야 할 말도 있는 듯했다.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에 있는 광려중학교에서 국악관현악단을 지휘하는 강건식(42) 선생.
지휘봉을 들고 학생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음악선생님을 바라보는 50여 명의 학생과도 같았다.
사랑 좇아 경상도 온 ‘서울 촌놈’ 이야기
강건식 선생은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한국교원대를 졸업하고 첫 발령지도 경기도 안산시에 있는 본오중학교. 음악교육학을 전공한 그는 본오중학교에서 합창반을 만들었고 입상도 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죠. 무반주였던 합창반 준비곡에 제가 직접 반주를 작곡해 대회 당일 연주했습니다. 당시 심사위원장이 합창연주 평에 대해 ‘무반주곡에 반주를 작곡한 음악선생님의 시도가 새롭게 들렸다’고 했는데요. 당시는 기분 좋게 느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혹평이었던 듯합니다.”
그는 어딜 가나 합창과 합주 등을 도맡아 꾸려나갔다.
그런데 20대 중반이었던 나이는 남녀공학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특히, 사춘기인 여학생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
“중학생들의 생각이나 문화를 몰랐기 때문에 학생들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여학생은 더 심했죠. 그래서 다음해부터는 남학생반만 수업했어요.”
그렇게 경기도 언저리에서 맴돌 것 같았던 그의 인생은 경남에서 둥지를 단단히 틀었다. 또 10여 년 만에 광려중학교에서 여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여학생반 담임도 맡았었다. 그는 그동안의 교직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여기에다 든든한 지원군 아내가 있어 힘이 더 난다.
진주에서 창원으로 출퇴근하는 강 선생님은 결혼을 하면서 경남에 오게 됐다.
“대학교 시절 1년 후배인, 지금의 아내를 짝사랑했거든요. 그때는 말도 못하고 가슴 속에 담아두었죠. 그러다 졸업 후에 어렵게 연락처를 찾아냈어요.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용기를 냈습니다. 그 후로 오랫동안 장거리 연애를 했어요. 당시 아내는 진주 대동기계공업고등학교(현 경남자동차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었거든요. 주말에만 만났지만 결혼까지 골인. 그런데 결혼해서도 한동안은 주말부부로 살 수밖에 없었어요.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공립학교 교사였던 제가 경남으로 학교를 옮겼습니다.”
2002년 강 선생은 의령중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국악교육을 시작한 첫 학교다. 대금산조 동아리를 만들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국악교육은 광려중학교에서도 이어졌다.
“서양음악이 다 인줄 알았지요…”
20살 넘어 국악을 접했다는 강건식 선생. 그는 서양음악이 다 인줄 알았던 청년 시절을 회상했다.
“음악을 할 수 있는 계기는 고등학교 시절 학생 성가대 활동이었어요. 우연히 통학버스에서 한 친구가 전날 밤 겪은 무서운 얘기를 하는 바람에 한동안 다니지 않았던 교회에 나가게 되었지요. 고등학생이 되어서 교회에 나가보니 감회가 다르더군요. 삶에 대한 진지한 자세에서 바라보니 뭔가 알겠더라고요. 어쩌면 이것이 제 인생에 큰 변화를 가져다준 것 같아요. 쎄시봉 조영남이나 양희은, 윤형주 같은 음악인들도 고등학생 시절 교회에서 음악을 배웠으니까요. 교회에 나가는 고등학교 시절 독학으로 피아노와 기타, 작곡 등을 익혔습니다.”
그는 부모님을 설득하는 어려운 과정을 거쳐 작곡 레슨을 받았다. 대학교 시절은 음악에 빠져 살았지만, 교직을 이수하기 위한 공부는 힘들었단다. 수강 신청한 20학 점 중 12학점이 F일 정도로 학과 공부는 소홀했다. 음악만 하고 싶었다는 그.
강 선생은 “처음에는 입학을 후회했다. 대학교육과정이 생각했던 것과 크게 다르더라. 음악 공부만 하기에도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음악 외적으로 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새벽부터 틈나는 대로 악기연습과 악보분석, 과외 전공서적 공부, 음악감상 등을 했다. 하지만 학사경고를 받는 등 고충도 따랐다. 학사경고를 두 번 받으면 제적 대상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타협했다. 이 시절이 지금의 음악인으로서 음악교사로서 큰 밑바탕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가 심취해있던 음악은 서양음악이었다. 대학시절 국악기초이론이라는 전공필수를 이수할 때도 속으로는 우리가 왜 이런 음악 같지 않은 것을 배워야 하나 싶었단다. 오직 서양음악만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졸업 때까지 단소와 가야금, 판소리, 전통가곡, 국악이론, 한국음악사, 국악교수법 등을 ‘억지로’ 배웠다. 하지만, 전화위복이 됐다.
“현재 음악교과서 수업내용을 보면 국악이 50% 가까이 차지합니다. 대학시절 국악을 배운 게 참 다행이지 뭐에요. 더 수월하게 국악부분 수업을 지도할 수 있거든요.”
국악을 좋아하지 않았던 그가 국악에 대한 매력을 알게 된 것은 서양 음악적 편견을 버렸을 때부터라고 했다.
“20세기 서양음악 창작품들은 우리가 흔히 알고 듣는 그런 음악이 아닙니다. 20세기 서양음악은 이미 지난 수백 년간의 유럽의 전통을 버리고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예술 사조를 거쳐 소수 민족의 음악을 작곡가 자신만의 음악 언어로 재창조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았을 때 제가 지금껏 고집했던 편견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깨달았죠. 이때부터 대중음악과 타민족의 음악, 록, 재즈, 헤비메탈 등 가리지 않고 많은 음악을 들었습니다. 국악도 전혀 다른 느낌으로 와 닿았어요. 이것이 시작이었습니다.”
학교 종소리를 국악으로 바꾼 그의 열정
국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결혼하면서부터다. 진주에서 아내와 함께 대금을 배우러 다녔다. 10년째 대금을 잡고 있다. 그는 국악을 이해하려는 사람이면 한 가지 악기는 깊이 있게 배우기를 추천했다.
공립교사인 그는 대금산조라는 동아리를 꾸린 의령중학교를 떠나더라도 국악동아리를 만들어 지도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때마침 국악관현악단을 만들어 지도할 교사를 뽑는다는 공고를 봤다. 광려중학교였다. 그는 2009년 3월 전보특례로 광려중 교단에 섰다. 그는 “거리는 멀지만 국악교육의 꿈을 안고 왔다”고 말했다.
광려중학교는 2007년 3월 1일 개교한 신생학교였다. 당시 백종철 교장은 학생들이 앞으로 세계적인 지도자가 되려면 문화예술을 알아야 하고, 특히 전통문화를 익혀야 한다고 강조했단다. 그래서 국악관현악단이 만들어지고, 학생들 모두 단소를 배웠다. 또 예절실을 두어 전통예절 수업도 받게 했다. 이 교육은 송봉기 교장이 이어가고 있다.
강 선생이 국악교육을 하는 이유는 바로 ‘뿌리찾기’다. 다르게 표현하면 ‘나를 찾기’다. 나를 알려면 부모님을 이해해야 하고, 부모님 조상을 알아야 한다. 그들이 누렸던 문화와 예술을 통해 그 속에 담긴 삶의 정신을 깨쳐야 오늘날 나의 삶 속에서 새롭게 창조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철학이다.
그가 국악관현악단을 맡으면서 학교에는 작은 변화들이 일었다. 먼저 학교 종소리가 국악으로 바뀌었다. 졸업생들은 종소리를 못 잊어 다시 학교에 들르기도 한단다.
또 학생들이 지겨워할 법한 국악관현악단은 최고 인기 동아리가 됐다. 지원자가 많아 일일이 가려 뽑을 정도.
아쟁, 거문고, 해금, 가야금, 대금, 피리, 전통타악기(북, 징, 꽹과리, 장구)와 퓨전을 가미하고자 들인 드럼과 키보드 등을 1~3학년 학생 52명이 호흡을 맞추고 있다. 강건식 선생이 총 지휘를 맡고 일주일에 한 번 지도 강사 7명이 파트별로 따로 교습을 한다.
점심시간과 토요일 방과 후 연습을 하는 국악관현악단 학생들. 10대답게 산만하게 뛰어놀던 학생들은 강 선생님의 지휘봉에 맞춰 갑자기 돌변한다.〈멋으로 사는 세상〉을 연주하던 50여 명의 학생 눈빛은 그들을 바라보는 강건식 선생과 닮아 있었다. 그들의 여정은 지난달 27일 진주기계공업고등학교에서 치러진 ‘제48회 경남중등학생종합학예발표대회’에서 국악관현악 합주부문 최우수상을 받았다. 백대웅 작곡의 〈남도아리랑>을 연주했다. 이번 수상은 창단 이후 4년 연속이라는 쾌거였다.
강 선생님은 “음악은 짧은 시간이라도 꾸준히 연습하는 것이 중요해 점심시간을 최대한 활용했다. 또 학생들끼리 교감하고 소통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여름 방학에는 4박5일 음악캠프를 열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광려중학교 국악관현악단은 오는 28일 교육과학기술부가 주최하는 ‘전국학생오케스트라 페스티벌’에 경남을 대표로 출전해 서울 KBS홀에서 연주하고, 오는 12월 1일에는 3·15아트센터 대극장에서 학생국악관현악단으로서 경남 최초로 단독 연주회를 열 예정이다.
그는 지난해 ‘올해의 스승상’을 받는 등 국악교사로서 인정을 받았다.
감동을 주는 교사로 음악인으로
강건식 선생은 ‘음악은 감동을 통해 피어나는 10대에게 성취감과 자신감을 심어준다’고 믿는다. 그래서 합주를 지도할 때 음악적 완성보다 과정을 중요시한다. 그게 지도교사 역할이라 여긴다. 국악도 교육이 목적이지, 음악이 우선이 아니라고 했다.
“국악을 통해 마음 깊이 편안함을 느끼고 자연스럽게 공감하면 감동이 됩니다. 감동은 사람을 변화시키죠. 학생들이 감동했다면 교육은 충분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평생 간직하는 말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 작곡 선생님 서재에서 우연하게 집어든 책 한 권. 책 머리말에 적혀있던 간디의 한마디 말. ‘나는 한 인간에게 가능했던 일이 모든 사람에게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늦깎이로 작곡, 국악을 시작한 자신에게 용기를 줬단다.
그리고 또 하나.
잠재된 음악적 감수성과 정신적인 힘을 일깨워주셨다는 지인에게서 전해들은 말
‘초인이 되라.’ 이 말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도록 격려한단다.
앞으로 자신이 만든 곡을 학생들과 합주하고 싶다는 강건식 선생.
52명의 학생과 눈을 마주치며 고사리 순을 지도하며 오늘도 국악에 매진하는 그는, 감동을 주는 사람이었다.
경남도민일보